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이야기 (부안)
■ '매창梅窓과 유희경의 사랑 이야기'
전북 부안 매창공원에는 매창梅窓(1573-1610)의 묘와 함께 그녀가 사랑한 정인, 천민출신 유희경 (1545~163 6)의 시비가 있다.
○ '매창을 생각하며'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
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유희경은 매창보다 28살이나 많은데 1591년 따뜻한 봄 날 그의 나이 46세 때 18세의 매창을 부안에서 만난다. 매창은 처음 유희경을 만났을 때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서 유희경과 백대붕 중에서 어느 분인지를 물었다. 유희경과 백대붕은 천민이지만 시를 잘 짓는 사람으로 부안에서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허균의 글 <성수시화>에 나오는 유희경과 백대붕에 대한 소개를 살펴보자.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 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 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林億齡의 호)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 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라 하니 양송천梁松川(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자가 있어 또한 시에 능했다. 일찍이 문지기를 했는데, 그의 동류同類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하고 연약했다. 까닭에 권여장은 만당(晩唐)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 체라고 일컬었으니 대개 그 연약함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본 순간 연정을 느낀다. 그녀가 시도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서 보통 기생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는 첫 인사로 다음 시를 읊는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야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나에게 선약이 있으니/ 찌푸린 고운 얼굴을 고칠 수 있다네./ 깊이깊이 비단 보자기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리운 임에게 주고 싶어라.
그리고 둘은 서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한껏 정을 주고받는다. 유희경의 문집 촌은집에는 그는 예학이 밝았기에 색을 가까이 안하였으나 그 때 처음으로 파계 를 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무튼 둘은 요즘 말로 진하게 사랑을 나누웠다. 소위 천민 시인과 기생시인과의 만 남. 정이 통하였으니 얼마나 몸과 마음으로 염정을 불 태웠을까.
그런데 이 사랑은 짧게 끝난다. 그리고 이별이 찾아온 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이별하기 싫어서 다음 시를 짓는다.
● '이별하기 싫어서'
동풍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
이 좋은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잔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지.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이듬해 1592년 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유희경은 의병 활동을 하게 되었 고, 전란은 둘을 상당기간 갈라놓는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를 못 잊어하고 그리워하나 만나지를 못한다. 매 창과 유희경은 그 그리움을 편지로 주고 받지도 못한 채 각자 시로 남긴다.
먼저 언급한 바 있는 매창공원에 있는 유희경의 시비가 바로 매창에 대한 그리움의 시이다. 그리고 유희경에 대한 매창의 그리움은 널리 잘 알려진 이화우 시조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째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는 배꽃이다. 봄 4월경이면 배꽃이 비처럼 떨어진 다. 봄에 이화우 떨어질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 가을 바 람에 낙엽 지는 이 때 그 이도 나를 생각하는지 궁금하 다. 그이는 천리 밖 서울에 있다. 천민에서 당상관까지 벼슬이 오른 유희경은 궁궐 바로 근처에 침류대를 짓고 사회 저명 인사들과 잘 지내고 있다. 지금도 그이가 날 생각할 까. 나는 외롭게 그이 꿈만 꾸고 있다. 또 매창이 쓴 '임 생각'이란 시도 있다.
○ '임 생각'
애 끓는 정 말로는 할 수가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반나마 세였고나
생각는 정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원래 이 시는 두 수인데 매창공원의 시비에는 둘째 수가 적혀 있다.
매창은 유희경과 헤어진 후 유희경을 못 잊어 한다. 그 리고 한 사람 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절개를 지킨 다. 어쩌면 열여덟 순정을 처음 바친 이가 유희경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생이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뭇 남성들에게 웃음과 재주 그리고 몸을 팔아야 하는 것이 조선의 기생 아닌가. 소위 수청 을 들어야 하는 것이 기생의 본분 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녀는 지조를 지킨다. 아무에게나 몸을 주지는 않는다. 뭇 남성들이 매창의 인기에 매료되어 술 한 잔 하고 잠자기를 원하였으나 매창은 그때마다 잘 뿌리친 것이다.(실제로 매창의 정인은 여럿 있다. 그중 한 사람 이 인조반정의 주역인 李貴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다.)
● 취한 손님에게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어 찢어지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질까 그게 두려울 뿐이네.
이후 세월이 많이 흘러서 1607년이 되었다. 유희경과 매창은 처음 만난 지 1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매창의 나이 34세. 그리고 유희경은 62세. 유희경이 전주에 내려왔던 모양이다. 퇴물에 가까운 매창과 회 갑을 넘긴 유희경. 둘은 열흘 동안 진한 사랑을 한다.
너무 늦게야 매창을 다시 만나고는
옛날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 했는데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던가.
내 온 것은 임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라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요.
위 시는 다시 만났을 때 쓴 유희경의 시이다. 매창도 옛일을 더듬는 시로 화답한다.
○ 옛일을 더듬으며
임진 계사 두 해 동안 왜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이야 그 누구에게 호소하리까.
거문고 옆에 끼고 외로운 난새의 노래를 뜯으며
삼청동에 계실 그대를 서글피 그리워했지요.
매창의 시에서 삼청동은 유희경이 사는 동네이다. 지금의 청와대 근처. 유희경은 궁궐 가까이에 침류대를 지어 놓고 당시의 저명 인사들과 사교를 하였다.
다시 만난 이들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부안 시대를 활보하고 다닌다. 변산 반도의 좋은 곳을 구경하고 다닌다. 내소사, 개암사 등 산천을 구경하였으리라. 당상관인 유희경은 매창을 나귀에 태우고서 폼나게 다녔으리라. 그리고 농염한 매창과 유희경은 밤마다 진하게 사랑을 하였을 것이다. 유희경이 쓴 농염한 사랑시가 그 정황을 뒷받침하여 준다.
● 계랑을 놀리며
버들 꽃 붉은 몸매도 잠시 동안만 봄이라서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이 참겠소.
무산에 운우의 정 자주 내리세.
무산의 운우. 섹스를 하는 것이 운우지정이다. 구름도 되고 비도 되는 무산의 선녀가 초나라 왕과 동침을 하여 황홀경에 이르는 중국의 고사. 60이 넘은 유희경도 옛 정인을 만나서 사랑을 하니 좋기는 좋았나 보다. 그러나 이런 진한 사랑도 열흘 만에 끝난다. 유희경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정말 이별하기가 싫었다. 첫 이별은 다시 만날 것을 기 약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이별은 만날 기약이 없는 것이 다. 더구나 30대 중반의 퇴기, 지는 매화 매창이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 '이별하기 싫어서'
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지더라도
임 모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지소서.
닭 울음소리 들리고 날은 곧 새려는 데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유희경이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 주길 바랬으리라. 그러나 유희경은 예를 지키는 점잖은 인물인지라 기생을 첩으로 데리고 가지는 못하였다. 다정이 병이고, 이별이 병이 되었을까. 매창은 병들어 몸져눕는다.
○ '병들고 시름겨워'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에게
굶고 추워 떨며 사십년 길기도 하여라.
인생은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가슴 속에 시름 맺혀 수건 적시지 않는 날 없네.
유희경과 헤어진 후 3년 뒤인 1610년 여름. 그녀는 죽는 다. 유희경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그녀는 유언에 의해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와 함께 이곳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힌다. 뒤늦게 매창의 죽음을 안 유희경은 조용히 슬퍼하며 그의 문집에 만시를 남긴다.
●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 계랑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너의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정미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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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梅窓, 1573~1610)/ 전라북도 부안(扶安)의 기녀로 고을 아전인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계유년 (癸酉年)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계생(癸生) 또는 계생(桂生),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자호(自號)를 매창(梅窓) 이라고 했다. 시와 노래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그가 죽은 지 45년만인 1655년에 무덤 앞에 비가 세워 졌고, 58년 뒤인 1668년에는 시집 『매창집 (梅窓集) 』이 간행되었다.
『매창집』 발문에 매창이 시를 잘 읊어 한 때 수백편의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거의 흩어져 1668년 10월 아전들이 외워 전하던 각 체 58수를 얻어 개암사에 서 목판에 새겨 간행한 것으로 보아 매창의 한시가 아주 뛰어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매창은 기녀로서 당대 많은 사대부와 교유하였으나 가 까이 지낸 사람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 ~1636)과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묵 재(黙齋) 이귀(李貴, 1557~1633)이며, 이 중 유희경 과는 각별한 애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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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터넷의 바다에 떠도는 것을 퍼서 약간 다듬은 글입니다. 1차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혹시 알고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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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중病中'/매창
봄날 탓으로 걸린 병이 아니라
오로지 님 그리워 생긴 병이라오.
티끌 덮인 이 세상엔 괴로움도 많지만
외로운 학이 되었기에 돌아갈 수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