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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

왕숙천의 유래

은월 김혜숙 2014. 9. 25. 09:42

1. 명칭의 유래

 

왕자의 난으로 함흥에 갔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으로 환궁하던 중에 지금의 진접면 팔야리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이 마을을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왕이 자고 갔다'라는 뜻으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왕숙천이라 명명했다고도 전하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왕숙천의 유래를 이야기 하자니 자연 함흥차사부터 더듬
어 갈 필요가 있어서 간략하게 적어 봅니다.

첫째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가장 아끼던 계비 신
덕왕후의 아들 방번(芳蕃)·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 심복을 잃은 태조는 상심하여 정사에 뜻을 잃고 왕위를
정종에게 양위하였고 이어서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芳遠)에게 환멸을 느낀 그는 1401년
태종 1년 함흥으로 갔으며 태종은 평소 태조가 신임하던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그해 4월에 겨우 모시고 왔으나,
1402년 11월 다시 함흥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두번째 전하는 이야기
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 어미와 새
끼가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 어미와 새끼가 서로  애타게
찾아 울부짖는것을 보면서 아뢰기를“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인간의 부모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
습니까?”라며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며칠을 묵으며,
하루는 태조와 박순이 장기를 두는데 천장에서 쥐가 새끼
를 안고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
다. 이에 박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
자고 청하니 태조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세번째 전하는 이야기
태종은 궁리를 거듭한 끝에 태조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무
학대사를 보내어 겨우 태조를 환궁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  팔야리에서 여덟
밤을 자고 갔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여덟배미' 현재
도 여덟배미라고 부르며 그 곳이 포천과 남양주로 나누어
지고 남양주 여덟배미 일부는 포천 여덟배미로 불려지며
현재 행정명으로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
을 앞을 흐르는 내를 '왕이 자고갔다'는 의미로 '왕숙천'
이라 부르며 구리시를 지나 한강으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한 동구릉과 세조의
광릉 등 여러 임금들의 능이 있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연
유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세조가 광릉에 안장(安葬)된
후, '왕이 길이 잠든다[永宿]'는 뜻에서 '왕숙천'이라 이
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도 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왕산내' 혹은 '왕산천(王山川)'이라 고도 부르는데, 이 역시 '王陵과 관련된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여지도'에도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왕숙천의 유래를 회원, 일반주민님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왕숙천, 벼락소가 전설로 내려오는 고증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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