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月(은월) 시 ##스튜디오
광화문 세종대왕님께 -임보 본문
광화문 세종대왕께
임 보
전하, 밤도 깊은데 아직 침소에 드시지 않고 무슨 책을 그리 골똘히 들여다보시니껴?
혹 목민심서라도 들춰 보시니껴? 아니믄 칼의 노래라도 읽고 계시니껴?
그렇게 밤잠 주무시지 않고 독서삼매에 빠져 계시니 안질이 심할 수밖에요
요즘은 온양의 온천수도 초정의 약수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니 미리 조섭하셔야 합니더
옛날과는 달리 전기불이 대낮처럼 환하기는 합니다만 인경도 울리지 않는 광화문 심야
내시도 궁녀도 데불지 않고 황량한 광장의 옥좌 위에 홀로 앉아 계시는 전하,
혹 감기라도 드시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더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세상이 온통 난리여서 한잔 했습니더
참, 이 작은 강토가 두 동강으로 토막이 난 사실 알고 계시니껴?
왜놈들에게 짓밟혔다가 가까스로 되찾는가 싶더니
힘 있는 놈들의 등살에 밀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더
가관인 것은 두 패로 나누어진 한 핏줄이 원수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물어뜯고 못 잡아먹어 안달입니더
그런데 전하, 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래도 참 기특도 합니더
운동도 잘 하고 머리도 괜찮아서 장사도 잘 합니더
얼마 전 아시안게임에선 왜놈들을 제치고 2등을 하기도 하고
전자산업이며 배를 만드는 일엔 세계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지 뭡니껴
뭔가 싹수가 보이는 백성들 같기는 하지예?
아마도 전하의 총기를 이어받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더
그 시절에 해시계 물시계를 만드시고
비를 재는 측우기며 천문을 관측하는 여러 기구를 만드셨으니…
그렇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것은 실수였습니더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 글자를 만드셨다고 했지예?
전하의 그 측은지심이 세상을 이처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더
너도 나도 쉬운 한글을 다 익혀 제 뜻을 펴느라고 얼마나 시끄럽습니껴
비위에 조금만 어긋나도 욕을 하고 대모를 하고 난리도 아닙니더
장관이고 통령이고 물어 뜯겨 만신창인기라예
전하께서 훈민정음만 만드시지 않았더라면 어리석은 백성들을 어리석게 두어
후세의 통치자들이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더
깨인 백성들 다 때려잡을 수도 없고… 그놈의 민주주의가 참 골칩니더
딸꾹!
임보 (강홍기) 시인
- 출생-1940년 6월 19일 (만 75세)
- 학력-서울대학교 국문학과
- 수상-2014 제30회 윤동주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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