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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은월 김혜숙 2015. 7. 12. 16:43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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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시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1981년 '시와 경제'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

1982 <<한국문학의 현단계>>에 평론 <지금 이곳에서의 시> 발표

제50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밤에 쓰는 편지>(청사)

동덕여대 인문학부 문예창작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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