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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

인문학 열풍의 기이함에 대하여ㅡ장석주(옮긴글)

은월 김혜숙 2017. 10. 11. 12:24

인문학 열풍의 기이함에 대하여

 

아마 인문학 열풍이 이는 듯하다. 이곳저곳에서 인문학 강연이 열리고, 강연마다 청중이 꼬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열로 번질 조짐마저 보인다. 인문학 출판계의 극심한 불황이나 대학 내 인문학 관련 학과의 통폐합 사정과 비대칭적인 사회 일각의 인문학 과잉 수요는 당혹스런 사태다. 문학의 부피가 작아지고,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독서 인구의 씨는 진작 말라버렸다. 이런 사정에 견줘지는 인문학 열풍은 역설로 우리의 지적 나태함과 인문학의 빈곤을 반증한다. 우리 사유에 넓게 스민 피상성, 속물성, 거짓말, 과장, 허장성세 따위는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반인문주의 위에서 빚어진 것임을 말한다.

 

책이 문학·철학·역사를 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은 ‘책’이다. 책은 생각을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며 풍부한 자양분을 준다. 무엇보다도 책 읽기는 학습 기억을 늘리고 새 지식을 얻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인류는 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본다. 책은 무지에서의 해방과 쉼 없이 성찰하는 삶을 주는데, 이때 성찰은 도덕과 윤리의 프레임에 비춰 모호한 것에 윤곽과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한 통계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하루 10분 이상 책을 읽는 우리나라 성인 인구가 열 명 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먹방’과 ‘막장 드라마’를 보고 그것을 얘기하는 사람은 있을망정 무언가를 읽고 읽은 것에 대해 진자하게 대화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옛날의 그 많은 책 읽던 사람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책을 멀리 하면 어휘력과 문어 해독력 빈곤은 필연이다. 또한 논리의 ‘전이(轉移)’나 ‘언어 간 연상’ 사유, 복잡한 인과론적 사유를 밀고나가는 일도 도무지 불가능해진다. 책에서 멀어지며 ‘생각함’을 낯설게 여기고, 삶은 즉물적인 반응의 연쇄로 전락한다. 우리가 맞은 작금의 현실, 즉 저출산, 청년 실업, 극한 경쟁, 소규모 자영업의 불황, 가계 부채 증가, 가파르게 오르는 집값, 고령화로 치닫는 사회 등등이 초래한 압박감 탓일 수도 있을 테다. 먹고 사는 일에 내몰려 책 읽을 시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사정에 비추자면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으라는 것은 한가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먹고 사랑하며 소통하는 것은 세계라는 ‘무대와 장(場)’이다. 사람은 늘 장소의 일부로 귀속한다. 사람은 ‘무대와 장’의 일이고, ‘무대와 장’이 우리들 현존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간다. 사람과 장소는 늘 하나로 움직인다. 장소가 사람이고, 사람이 곧 장소다. 그래서 사람을 사람으로 빚는 장소의 본질과 현상을 파헤쳐 드러내는 것도 인문학의 작은 책임이다. 이렇듯 인문학은 작은 것에서부터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일체의 ‘기초적 지식’을 품고, 삶과 세계, 자연과 우주, ‘도교와 선(禪) 사상’에 이르기까지 실로 넓은 범주에 걸쳐진다.

 

하지만 인문학은 놀랍도록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인문학은 항상 소요(騷擾)와 전쟁 속에 있다. 인문학은 이 진부한 악의 세계에서 벌이는 되먹임의 전쟁이자 자기 본성에 스민 비루함과의 전투다. 인문학은 성자의 길이 아니라 전사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성자가 진리에 봉헌한다면 전사는 가설이나 관점과 피 흘리며 싸운다. 인문학은 불확실성의 주체가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고, 나아갈 바를 두고 그 의미에 대해 묻고 따지는 일이자, 존재의 철학적 개시(開示)를 뜻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인문학은 복잡성 그 자체, 수수께끼, 비밀에 감싸인 사람에 대한, 사람을 위한 공부다. 새의 노래나 늑대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쪼개고 분석해서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행위다. 그것은 사람의 정체, 본질, 형이상학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고, 그걸 직업으로 삼는 자가 인문학자다. 인문학은 생각을 쪼개고, 재배열하며, 다른 생각과 접속시키고, 그 뿌리를 파헤쳐 들어가는 일을 격려한다. 주체는 생각의 기초이자 결실이다. 주체로의 이동! 주체를 고갱이로 삼은 생각의 분출과 파열, 약동과 도약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은 새롭게 이해되고 발명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워주고, 세계 이해에 대한 폭을 획기적으로 확장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것은 30만 년 전이다. 우발적이고 우연에 속박을 받는 ‘인간이라는 종’이 일군 문명 세계는 30만년의 마지막 순간에 수직 상승한다. 마치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는 듯한 성장 변곡점을 그린 계기는 문자의 창안과 책의 출현에 힘입은 것이다.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는 불, 바퀴, 화식, 농업, 책, 전기,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 폰을 창안하고 쓰면서 진화상에서 기적 같은 성과를 내지만 문명이 뿜어낸 폐해도 적지 않다. 인류는 지구 자원을 독점하고 과소비하면서 열대우림을 없애고 생태환경을 죽이는 오염을 키웠다. 대형 포유동물 따위의 생물 종들이 멸종하고, 수많은 식물이 지구에서 사라졌다. “지구에서 인간은 일종의 병원균이나 암세포, 아니면 종양처럼 행동한다.” 가이아 학설을 창시한 생태론자이자 미래학자인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생태를 위협하는 “파종성 영장류 질환”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을 한다는 건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다’라는 동사(動詞)는 주체가 정체(停滯)를 깨는 역동을 품으며, 동사로 제 살아 있음을 드러낸다. 이 동사의 발생론적 근거는 흐름과 운동이다. 동사는 주체 발생의 근거와 유쾌한 놀이의 히스테리를 품는다. 주체는 동사와 함께 비로소 산 주체로 움직인다. 몸-주체는 존재함을 넘어서서 동사와 더불어 세계를 흔들고 나아간다. 몸-주체는 ‘~을 하다’로 우뚝 섬, 됨과 이룸, 철학자 장-뤽 낭시에 따르면 “실존이라는 파열의 확장”을 이룬다. “몸은 의미의 원-건축술(larchi-tectonizue)이다.”(장-뤽 낭시,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8쪽.) 당장 검색하는 손길을 멈추고 사색을 하라! 책을 읽는 즐거움과 생각하는 즐거움은 하나다. 읽은 것을 화제로 삼고 대화하라. 인문학을 하자! 인문학을 통해 인문학 너머로 나가자. 인문학을 넘어 자신을 호모 노부스(Homo novus)로 리셋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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