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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

나는 너를 안는다 ㅡ장석주(옮긴 글)

은월 김혜숙 2017. 10. 13. 12:33

□ '나는 너를 안는다' / 장석주

 

사랑하는 자의 얼굴은 환하게 빛난다. 이 얼굴이 빛나는 것은 사랑이 감히 신의 영역인 무한과 불멸에 기대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이 얼굴의 빛은 타자의 현전을 선취한 흔적이다. 이 빛은 그가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는 안도감과 평화가 만드는 빛이다. 사랑이 사라지면 이 빛도 사라진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진부하지만 ‘사랑한다’는 선언 속에서 그 생명을 얻는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그저 ‘말소리’가 아니라 의미의 범주화라는 맥락에서 ‘너는 내게 의미가 있는 존재’라거나 ‘네가 없다면 내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든다. 흔히 사랑은 기쁨과 불안을 동반하는데, 그 감정이 곧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사랑할 수 없음의 불가피하고 당위적인 부정이다.

 

사랑은 다른 선택지를 다 지워버린 사랑할 수밖에 없음이다. 많은 경우 이 ‘사랑할 수밖에 없음’은 윤리로 도포(塗布)되는데, 사랑의 본질은 “전략적인 상호 기만”이다. 사랑에 빠지면 더 착해지고, 더 우아해지고, 더 자주 호감을 사는 행동을 한다. 사랑이 무조건적인 환대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를 이상화하는 감정에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신의 매력을 증대시키고, 상대는 매력을 더 크게 과장해서 바라본다. 서로의 매력이 밋밋한 것이라면 사랑의 감정에 쉬이 불꽃이 달라붙지 않는다. 식은 재가 불꽃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껏 달아오른 감정만이 이윽고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른다. 사랑이 자주 의심과 혼란을 불러오는 것은 그것이 감정의 기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남녀의 사랑은 기쁨 가운데 영혼을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부모의 자식 사랑에는 그런 혼란이 한 점도 없다. 자식에게 쏟는 어미의 사랑은 흥분과 불안이 배제된 투명함 그 자체다. 자율신경계의 지배만을 받는 태아로 나오는 것 자체로는 공적인 의미가 있다. 이 우연한 생명은 어느 집안의 몇 대 독자로 태어나는 것, 혈통을 잇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커가면서 스스로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기는 부모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 부모를 완성하는 존재, 부모의 미래를 선취한다는 가정에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은 다름아닌 자신의 또 다른 미래를, “아직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미래를” 향한 사랑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아기는 어머니에게 피, 내장, 심장을, 아버지에게 골수, 신경, 뇌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에게 숨결을 받는다고 한다. 임신과 출산이란 그저 우연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갓난아기의 처지에서 보자면 출산은 모태의 평온함에서 떨어지는 낯선 박리(剝離)의 경험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난 갓난아기는 신생아실로 강제 유배당한다. 갓난아기는 추방된 자로서 낯선 세상과 처음 대면한다. 물론 갓난아기는 부모에게서 환대와 사랑을 받는다. 갓난아기를 물고 빨며 품는 어미의 사랑은 원초적인 행위이다. 그 사랑에는 어떤 단서도 붙지 않는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 사랑은 동물적인 것에 가깝다. 인류가 살아남은 것은 오랜 전통으로 지속되어온 그 사랑 때문이다. 여기 “비가 수 천의 하얀 팔을 뻗어/너를 안는다”라고 노래한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있다.

 

비가 수 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안는다

흰 도화지 같은 공중에

너의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

주르륵 녹아 흐르는 입을 다시 그려줄게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파란 입술 그려줄게

 

비의 하얀 팔들은 어디로 가서

낯선 얼굴 어루만지는지, 어디로 날아가

검고 차가운 목덜미를 감싸며 흩어지는지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아직 따뜻하고 고요한 뺨이 있다는 듯

주황색 포클레인이 우뚝 멈춰 있다

부서진 옥상 위

아이의 슬리퍼가 고요히 젖고 있다

 

비의 팔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가는지

퍼붓는 빗속에서 아이는

하염없이 입을 벌리고 걸어간다

 

이기성, 「포옹」(이기성 시집 『채식주의자의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5)

 

이기성(1966~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마쳤다. 1998년 『문학과사회』에 시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하고,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등 시집 세 권을 펴냈다. 늘 세상에서 숨고 사라지려는 시인은, “밤의 심장에 고개를 처박고 창백한 고백을 몰래 만져”보는 이 내면성의 시인은, 오늘의 만찬에 초대되어 “번쩍이는 강철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광활한 모국의 식탁 위에서 덜덜 떨면서” 앉는다. 접시 위에는 “당신의 잘린 목”(「채식주의자」)이 놓이는데, 이 식탁의 난감함은 실존의 부조리에 대한 은유다.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주체의 의지와는 달리 육식의 식탁에 앉은 난감함이라니!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는 “당신의 존재를 덥석 베어 물고”, “뜨거운 혀로 당신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날카로운 이빨로 차가운 뼈와 뼛속에 감춘 권태의 쓴맛을 찢어 발”긴다.(「채식주의자의 식탁」) 이기성의 슬픔과 창백한 목소리의 시는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온다.

 

처음엔 「포옹」을 사랑의 시로 읽었다. 사랑에 빠진 마음을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삶을 약동으로 이끌고 메마른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한다. 사랑은 타자를 끌어들여 외로움을 해소하고 빈 정념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이 추동하는 행위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의미로 충만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마음에 항상 희열이 넘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영혼이 교란되고 마음의 혼란과 위기를 겪는 존재 사건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비가 수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끌어안는다. 물론 이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왜 그럴까? 끌어안은 대상은 ‘너’인데, 시인은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너’는 입도 없고, 노래하는 입술도 없다. 시인은 ‘너’에게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라고,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파란 입술을 그려줄게 하고 약속한다. 비의 하얀 팔들을 공중을 날아다닌다. 날아다니다 보면 이 사람의 얼굴도 만지고, 저 사람의 목덜미도 만지게 될 것이다. 그 얼굴은 “낯선 얼굴”이고, 그 목덜미는 “검고 차가운 목덜미”일 것이다.

 

먼저 ‘너’라는 타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시인은 이 ‘너’를 특정하지 않지만 ‘너’는 시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너’는 ‘나’의 저편에 있는 대자적 존재다. ‘너’는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무슨 일인가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시인이 이 ‘너’를 특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멀리 있기 때문이다.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너’는 ‘나’에게서 멀리 있다. 혹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떠돌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너’는 ‘나’의 지각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따라서 “수천의 하얀 팔을 뻗”는 비가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날아가서 얼굴을 만지고, 목덜미를 쓰다듬고, 그 누군가를 포옹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여기에 없는 ‘너’가 헤어진 연인이라면 ‘나’는 마음이 허전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할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너’는 없다. 비에서 연상한 “하얀 팔”로 누군가를 포옹하는 상상은 그래서 가능했을 테다. 그 상상의 바탕은 허전하고 슬프고 쓸쓸한 마음이다. 지금 여기 없는 ‘너’를 끌어안는 이 포옹은 환대의 행위이고,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이 포옹으로 인해 마음은 고적할 것이다.

 

시인은 멈춘 “주황색 포클레인”을 주목하는데, 비와 선명한 색채의 포클레인은 실은 아무 상관이 없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그것은 고적한 시인의 마음에 조응하는 객관적 상관물인지도 모른다. “주황색 포클레인”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은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아직 따뜻하고 고요한 뺨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 따뜻한 뺨에 뺨을 맞대고 부비고 싶은데, 그 대상은 여기에 없다. 부서진 옥상 위와 젖고 있는 아이의 슬리퍼를 보여줄 때, 이 쓸쓸한 풍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에 젖는 아이의 슬리퍼는 지금 여기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포옹의 대상이 연인이 아니라 ‘아이’였단 말인가? ‘아이’는 퍼붓는 빗속에서 입을 벌리고 하염없이 걸어간다. 이 시는 ‘아이’를 잃은 자의 마음을 노래한 시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 시를 잘못 읽었다. 상실과 부재가 낳은 슬픔을 머금은 이 시는 연인을 잃은 자의 마음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자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아이는 “작고 부드러운 시간을 키”우고, “울면서 희고 가볍고 공기처럼 투명”해진 바로 그 아이일까?(「범람하다」) 아이는 “빨간 얼굴로/울면서 태어”나, “종일 까만 눈으로 벽지를 뚫어지게 보”고, “흰 입술로 텅 빈 말을 중얼거렸”던 바로 그 아이, “영원히 자라지 못”한 그 아이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외투”를 입고 있는 아이다.(「천호동」) 아, 알겠다! 시인의 무의식적 상상세계에 죽어서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벌린 입은 “호스처럼 벌어진 목구멍 속으로/밤의 어두운 골목이 사라지고/노숙자의 커다란 발과 늙은 고양이가 사라”(「합창」)진 그 이상한 입구가 아닌가? 그 아이는 빗속에서 입을 벌리고 걸어가고 있다. 세상에 없는 그 아이의 뺨을 미치도록 부비고, 그 작고 따뜻한 몸통을 미치도록 안고 싶다. 그 마음의 갈망이 뻗어나가 내리는 비에 “수천의 하얀 팔”을 주고, 그걸로 빗속에서 울며 어디론가 가는 가엾은 아이의 뺨을 비비고 목덜미를 끌어안으려는 안타까운 몸짓을 보여준다.

 

시인은 생이 “어두운 장르”(「크리스마스」)라고 믿는데, 그 까닭은 고작해야 “검게 탄 열매처럼 정오의 허공에서 툭 떨어진 태양”(「스틸 라이프」) 아래에서 “무뚝뚝한 흑백의 오늘”(「오늘」)을 살아내는 게 생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기대를 내려놓은 자에게 허락된 생의 시간이란 “횡단보도 옆에 쓰러진 자전거의 검은 체인이/홀로 몇 바퀴 더 돌다/멈출 때까지”(「히치하이커」)의 무의미한 정동(情動)의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늙은이의 딸들은 “창가에서 하품을 하고 찻잔이 식어”갈 때 “하얗게 늙어”간다.(「스틸 라이프」) 시인은 그런 생의 찰나를 관조하며 “재의 글씨를 쓰고”(「스틸 라이프」)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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