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月(은월) 시 ##스튜디오

첫눈 오는 날 본문

겨울

첫눈 오는 날

은월 김혜숙 2017. 12. 2. 21:21

 

첫눈 오는 날

누군가를 떠올려야 하는데
누군가라는 추억이 난 없다

그 누군가가 꼭 이성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난 80년대 초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길에 남루한 그 보헤미안의
누더기를 걸친 빙판 위를 아스라하게
걷고 또 걷는 한 사내만 생각난다

그가 무엇 때문인지 집을 나와 
온 세상 전부가 안방이고 온 계절이 
자신의 계절인 만큼의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도 한땐 자그마한 공간 안에 
온 가족이 자신만 기다리는 숨이 막히는 
자그마한 집에 살다 제비 새끼 다 키운 날인지
참새떼 키운 때인지 모르지만 
그가 버린 것인지
그 알량한 가족이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한겨울 골목길 군밤 장사치도 길목 호떡집도
지나쳐 가면서 그저 바닥에 흘린 것이 아까워
입에 갖다 대며 살고

줄 것도 없지만 억지로 구걸도 하지 않는
첫눈 오는 날 그 화려했던 나목에 잎사귀
다 빼앗기고 헐벗은 나뭇등걸에 기대
땅에 떨어진 담배 한 개비를 물고 갔던
그 의문의 사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추운 겨울날 얼어 죽었다
어린 나에겐 첫 충격이고 첫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났다

 

 

< 첫눈 오는 날 >

 

 

'겨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꽃은 때를 못 맞췄다  (0) 2020.01.25
겨울나무  (0) 2017.12.20
겨울이 오고 눈은 내리고  (0) 2017.11.24
겨울로 달아난 허무  (0) 2017.10.30
달 그리미  (0) 2017.09.27
Comments